한때 경쟁자였던 일본과 중국의 동맹, 그 이면엔 엇갈린 판매 실적이 있었다.
유럽 시장 관세 장벽을 넘기 위한 중국의 현지 생산 전략이 본격화되고 있다.
일본 자동차 산업의 자존심으로 불리던 닛산이 중국 체리자동차와 손을 잡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때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하게 다투던 경쟁자의 협력은 단순한 파트너십 이상의 파장을 일으킨다. 이는 닛산의 극심한 ‘판매 부진’과 유럽 시장을 겨냥한 중국의 ‘현지 생산’ 전략, 그리고 일본의 ‘자존심’이 복잡하게 얽힌 결과물이다. 과연 한때 상상할 수 없었던 이 동맹은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될까.
판매 부진 닛산, 놀리는 공장 활용법 찾았나
어떻게 일본 대표 브랜드가 중국차 생산 기지를 자처하게 됐을까. 문제의 발단은 닛산의 영국 선덜랜드 공장이다. 캐시카이, 쥬크 등 인기 모델을 생산하는 핵심 기지지만, 최근 생산 라인 통합 이후 유휴 설비가 대거 발생했다. 닛산은 공장 가동률을 높일 방안을 절실히 찾아야만 했다.
이때 닛산의 레이더에 들어온 것이 바로 체리자동차다. 닛산은 공장 소유권은 유지하되, 자사 직원들을 활용해 체리 차량을 위탁 생산하는 방안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협상이 순조롭게 마무리된다면 이르면 2027년부터 닛산의 손으로 만든 중국 브랜드 차량이 유럽 도로를 달리게 된다.
자존심보다 실리, 역전된 판매량이 말해준다
닛산이 자존심을 접고 실리를 택한 배경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처참한 판매 실적이 있다. 지난 4월 영국 시장에서 닛산은 4079대를 판매하는 데 그쳤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숫자다.
같은 기간 체리그룹은 체리, 오모다(Omoda), 제쿠(Jaecoo) 등 3개 브랜드를 앞세워 1만52대를 팔아치웠다. 닛산을 2.5배 가까이 앞지른 압도적인 수치다. 이미 체급이 달라진 셈이다. 만약 당신이 운영하는 회사의 주력 공장 가동률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상황에서, 경쟁사가 2배 넘는 실적을 기록하며 생산 시설을 찾는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닛산의 결정은 냉정한 현실 인식이 낳은 필연적 결과로 풀이된다.
중국차의 현지 생산, 유럽 시장 판도 바꿀까
이번 협력 논의는 단순히 두 기업의 생존 문제를 넘어선다. 이는 유럽연합(EU)의 대중국 전기차 관세 압박 속에서 중국 브랜드들이 얼마나 절박하게 현지 생산을 추진하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최근 스텔란티스가 중국 둥펑자동차와 유럽 생산 협력을 발표한 것처럼, 중국 업체들은 높은 관세와 물류 비용을 회피하기 위한 카드를 적극적으로 꺼내 들고 있다.
업계에서는 닛산과 체리의 동맹이 현실화될 경우, 다른 완성차 업체들 사이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합종연횡이 잇따를 것으로 보고 있다. 과거 기술을 전수받던 중국 브랜드가 이제는 생산을 의뢰하는 ‘갑’의 위치에 서면서, 지난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글로벌 자동차 시장의 권력 구도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오종학 기자 fivejh@news-w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