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전기차 시장의 패러다임이 바뀐다.
주행거리보다 중요한 배터리 건강 상태(SOH), 수명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은 따로 있었다.

EV6 /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EV6 /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전기차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중고차 시장의 오랜 공식이 흔들리고 있다. ‘주행거리가 짧을수록 좋은 차’라는 상식은 이제 옛말이 될지도 모른다. 최근 공개된 한 분석 결과는 누적 주행거리와 배터리 성능 사이에 뚜렷한 연관성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히려 수십만 km를 달린 전기차의 배터리가 쌩쌩한 반면, 주행거리가 짧은 차의 배터리 성능이 더 빨리 저하되는 사례도 속속 발견된다. 그렇다면 중고 전기차를 구매할 때 2,000만 원에 달하는 배터리 교체 비용을 아끼기 위해 반드시 확인해야 할 단 한 가지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배터리 건강 상태(SOH), 운전자의 충전 습관, 그리고 변화하는 시장 표준에 있다.

주행거리는 참고일 뿐 진짜는 따로 있다



모델Y /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모델Y /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영국의 한 전기차 배터리 진단 전문업체가 전기차 및 하이브리드 차량 8,000여 대를 분석한 결과는 흥미롭다. 조사 대상 차량의 평균 배터리 잔존 수명(SOH)은 무려 95%에 달했다. 특히 출고된 지 8~9년이 지난 차량들조차 평균 85%의 성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통상 자동차 제조사들이 보증 기준으로 제시하는 70%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전기차 배터리가 차량의 수명보다 먼저 다할 것이라는 세간의 우려가 기우였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기술의 발전과 효율적인 배터리 관리 시스템(BMS) 덕분에 전기차 배터리의 내구성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16만km 달려도 쌩쌩한 비결은 충전 습관



이번 분석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주행거리와 배터리 상태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16만 km 이상을 주행한 차량에서도 SOH가 88~95% 수준으로 매우 높게 유지되는 사례가 다수 확인됐다. 반면 주행거리가 짧아도 배터리 성능 저하가 더 빠르게 나타난 경우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배터리 수명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사용 습관’을 꼽는다. 특히 충전 방식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배터리를 0%까지 방전시키거나 100%로 꽉 채워 장시간 방치하는 습관, 그리고 급속 충전을 반복하는 것은 배터리 셀에 스트레스를 줘 수명을 단축시키는 주범으로 지목된다.

반대로 완속 충전을 주로 이용하고, 배터리 잔량을 20~80% 사이로 꾸준히 유지하는 차량은 주행거리가 길어도 높은 배터리 성능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2천만원 아끼려면 SOH부터 확인해야



이러한 변화에 발맞춰 중고 전기차 시장의 평가 기준도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이제 계기판의 주행거리 숫자 대신 배터리의 건강 상태, 즉 SOH가 차량 가치를 판단하는 새로운 핵심 지표로 떠오르고 있다.

주요 중고차 거래 플랫폼과 렌터카 업체들은 이미 배터리 진단 서비스를 도입해 SOH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기 시작했다. 통상적으로 SOH 90% 이상은 신차 수준, 80~89%는 정상적인 사용 범위로 평가된다. 평균 2,000만 원에 달하는 배터리 교체 비용을 고려하면, 구매 전 SOH 확인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셈이다. 중고 전기차 구매를 고려하고 있다면, 주행거리라는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 배터리의 진짜 건강 상태를 들여다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오종학 기자 fivejh@news-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