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예술을 한껏 품은 한여름의 발레 공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발레단인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 동양인 최초로 박세은이 입단한 건 지난 2012년. 그곳의 최고무용수를 지칭하는 ‘에투알’들이 줄줄이 한국에 왔다. 직접 가보니 웬걸, 공연장은 관람객들로 가득 찼고, 굿즈 판매대는 도저히 내 차례가 돌아오지 않을 것만큼 긴 줄이 이어져 있었다. 공연 뒤 주요 단원들의 사인회를 위한 웨이팅은 당연히 더 길고도 길었다.
미술관에 가서 완벽한 비율의 다비드와 같은 조각상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 앞을 스쳐 지나가며 걸어다니는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시선을 빼앗기게 된다. 다비드보다 더 완벽한 비율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은 살아있기 때문이다. 생명력이 완벽한 비율을 이긴다.
거기에 그들이 환상적인 기술로 감정을 다해 춤을 춘다면, 더할 나위없이 아름다울 것이다. 그게 발레다. 지방과 같은 군더더기는 거의 없고, 뼈와 근육, 그리고 그것을 덮을 정도 만의 가죽을 가진 인간의 몸에서 필수 요소만 남긴 것 같은 발레 무용수들의 몸을 보면, 그 자체가 예술이구나 싶다.
남자가 아랫도리가 딱 붙는 타이즈를 입고 춤을 추는 것이 남사스러울 것 같다지만, 직접 공연을 감상하다보면 남사스럽다거나 민망함이라는 건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저렇게나 다양하고 섬세한 근육을 가진 인간의 신체에 감탄할 뿐이다. 인간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근육인데, 지방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우리의 근육 말이다. 그 아름다움과 예술 작품을 가릴 수 없으니, 타이즈를 입을 수 밖에.
인종의 다양성 자체가 현대 예술이다
2부에 걸친 100분 동안의 9개 공연은 록산느 스토야노프와 기욤 디오프가 문을 열었다. 이 중 남자 무용수인 기욤은 아프리카계 무용수다. 결코 흔하지 않다. 당연히 ‘354년 파리 오페라 발레 역사 최초의 아프리카계 수석무용수’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다.
박세은이 2021년에 수석무용수로 지명되었을 때도 같은 타이틀이 붙었다. 2023년에는 프랑스 문화 훈장도 받았다. 우리들은 그간 각종 예술 분야에서 ‘한국인 최초’, ‘동양인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은 뉴스를 수없이 봐왔다. 그만큼 차별의 전통이 깊다는 반증이다.
그 모든 편견과 차별을 다 뚫고 최고 자리에 앉은 것이라 더 특별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과 몸의 아름다움에 단번에 매료되면 어두운 피부는 낯설지도 이상하지도 않다.
두번째 공연도 동양인 박세은과 제레미 루 퀘르의 합무가 이어지고, 세번째 공연도 일본과 뉴질랜드계 혼혈 한나 오닐과 안토니오 콘포르티의 합작이다.
다양한 인종 특유의 개성과 분위기를 가진 무용수들이 어우러져 춤을 추니 공연 자체가 얼마나 풍성해지는지 단번에 느껴진다. 인종의 다양성 자체가 현대 무용이고 현대 예술이다. 백인들만 추던 춤은 중세에 머무는 것으로 족하다. 현대에는 그럴 자리가 더이상 없다. 그 지루함을 참아 줄 관객들도 더이상 없다.
다양한 장르를 품으며 폭발하는 에너지
물론, 클래식은 영원하다. 하지만 관객들은 현대적인 클래식을 원한다. No More Borinig Art를 선언하며 무용보다 더 오래된 미술계도 흥미진진해진 지 오래되었다. 거의 없다시피 한 무대 연출과 다소 평이하게 보이던 첫번째, 두번째 공연에 적응해야하나 싶을 때쯤, 흐트러진 침실을 무대로 관능성이 꿈틀대는 세번째 공연이 펼쳐졌다.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카르멘’의 하바네라가 시작되고 안토니오의 공연이 끝나자, 뮤지컬 시카고의 록시를 연상케 하는 파격적인 차림의 한나 오닐이 한마디로 무대를 찢어놓았고 사람들은 콘서트에 온 관객들처럼 소리지르며 열광했다. 몸의 근육, 관절의 움직임 하나 하나가 철저한 컨트롤 하에 살아움직이는 듯했다. 한나 오닐의 관능미와 카리스마, 완벽한 비율의 몸과 테크닉, 음악과 상대 무용수와의 호흡, 안무의 하모니가 완벽했다.
미니멀 한 무대 연출과 라이브 피아노 반주가 어우러진 레오노르 볼락과 기욤의 다섯 번째 공연 또한, 굉장히 흥미로웠다. 전통적인 발레에 대한 문제제기로 시작된 현대 무용을 발레로 풀어내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보게 만들었다.
2부의 시작은 조지 거쉰의 ‘내가 사랑한 남자’를 배경으로 재즈라는 음악을 발레로 풀면 어떤 느낌일까를 보여줬다. 그 다음은 발레 ‘신데렐라’ 2막을 공연했는데, 가장 글래머러스했던 1930년대 할리우드 여배우와 영화같은 느낌이 가득했다.
공연의 대미는 슈베르트 교향곡으로 공연의 핵심 멤버 5명이 총출동하여 장식했다. 기계 체조 유니폼을 연상시키는 무용수들의 의상은 남녀 모두 등이 모두 노출되어 있어서 그들의 섬세한 근육을 하나 하나 볼 수 있었고, 남자 무용수 둘이 합무를 하는 장면은 좀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여성보다 더 크고 더 긴 남성의 힘있는 신체가 부드러운 무용 동작을 할 때 그 이질적인 것들이 부딪히면서 내는 비정형적인 아름다움은 때로 여성의 것보다 더 큰 감동을 주고 더 우아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여성 무용수들이 어우러지는 무대도 물론 대단했다. 인종조차 잘 구분이 안갈 정도로 완벽히 똑같은 헤어와 의상을 한 무용수들이 각자 다른 체형과 다른 스타일로 같은 안무를 조화롭게 수행하면서 정형화된 모습을 뚫고 나오는 각자 다른 개성을 감상하는 재미와 감동이 있었다. 무용수들이 연출과 구성에도 참여했다고 해 더 의미가 있는데, 주로 잔잔한 음악들이 주를 이루다 마지막에 생동감있는 음악과 함께 수퍼스타들이 후련하게 하고 싶은 걸 다 보여준 것 같은 무대여서 관객들의 반응이 더 뜨거웠다.
팬서비스도 완벽했다. 공연이 끝난 후 순식간에 사인을 받기 위한 끝도 없는 줄이 이어졌고 여섯명의 핵심 멤버들이 자리했다. 자신들도 이런 팝스타 같은 환대와 반응이 새롭고 즐거운지 늘어선 팬들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담기에 바빴다. 무대에서는 집중하느라 진지했던 얼굴들이 얼마나 순진하고 부드러운지 반전 매력에 팬들은 더 빠져들었다.
오래된 전통을 가진 발레단에 한국인 무용수들이 입단하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아무리 발레 팬이라도 내가 가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남의 일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올림픽 때문에 다들 파리로 가는 상황에 파리에서 직접 내한 공연을 하러 최고의 무용수들이 와 주다니, 그 모습을 직접 가서 볼 수 있다니 국내 팬들에게는 꿈같은 상황이다.